집권 3년차가 되던 1964년, 박정희는 한국군을 베트남 정글로 파병을 결심했다. 명분은 ‘자유 진영 수호’였지만, 그의 복심은 따로 있었고 계산은 복잡했다. 가난한 신생 군사정부의 지도자에게 베트남은 험지인 동시에, 한편으로는 천재일우의 기회로 보였다. 베트남 파병은 한 나라의 운명을 건 도박이었다.
안보라는 절박함
박정희가 첫 번째로 고려한 것은 체제의 안전 및 생존이었다. 한국보다 경제력이 앞서는 것으로 평가되던 북한의 위협 아래, 1960년대에는 사실상 안보를 미군의 주둔에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 올인하는 분위기가 지속되자, 주한미군이 베트남으로 차출될 수 있다는 공포가 커질 수 밖에 없었다. 한국전쟁의 잔혹한 기억이 채 가시지 않은 시기였고, 전쟁의 상흔이 치유되기도 전에 박정희는 베트남 파병을 결정한 것이다. 부인할수 없는 사실은 파병은 참전을 의미하고 불가피한 희생이 전제된다는 것이다.
박정희에게 베트남 파병은 ‘주한미군이 한국을 떠날수 없게 만드는 가장 확실한 안전장치였다. 한국이 베트남 파병으로 미국을 지원한다면, 미국도 쉽게 한국을 등질수 없다는 약소국 지도자의 절박하지만 영리한 논리였다. 실제로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은 1964년 9월부터 1973년 3월까지 이어졌고, 연인원 약 32만 명이 투입됐다. 한 해 평균 5만 명에 가까운 병력이, 이국땅 베트남 전쟁터에서 한국의 안보를 대신 지켜낸 셈이다.
브라운 각서, 피로 바꾼 달러
박정희가 두 번째로 고려한 것은 돈줄이었다. 5·16 이후 박정희가 마주한 한국은 1인당 국민소득 100달러 안팎의, 세계 최빈국 중 하나였다. 공장을 세울 자본도 없었고, 기술도 없었고, 외화도 없었다. 그에게 베트남은 ‘외화를 벌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창구’로 보였다.
1966년, 주한 미국대사 윈스럽 브라운의 이름을 딴 이른바 ‘브라운 각서’를 통해 미국은 추가 파병의 대가로 한국에 막대한 보상을 약속했다. 그 보상의 일부가 바로, 한국군의 현대화 비용을 지원하고, 베트남에 수송할 군수물자를 한국에서 구매하고, 그리고 건설 및 수송 사업을 한국 기업에 위임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베트남 특수’다. 현대건설과 한진 같은 기업이 베트남에서 도로를 닦고 물자를 운송하며, 처음으로 해외에서 외화를 벌어들이고 대규모 공사의 경험을 축적할수 있었다. 병사들이 생사를 오가는 전투에 투입되는 댓가로 받은 수당은 고향으로 송금되어 가족의 생계를 도왔다. 전쟁 기간 한국이 벌어들인 외화는 10억 달러를 웃도는 것으로 추산되고, 이는 경부고속도로 건설과와 중화학공업 육성의 종잣돈이 됐다. 분명 베트남에서 파병 장병이 흘린 피와 땀은 한강의 기적을 가능케한 마중물이었다.
피로 벌어들인 외화의 그림자
그러나 박정희의 베트남 파병이라는 도박의 대가는 혹독했다. 10여년의 파병 기간 동안 한국군 5,099명이 전사했고, 1만 명이 넘는 부상자가 발생했다. 수많은 20대의 꽃다운 한국의 청춘들이 이름조차 낯선 이국땅에서 생을 마감해야했다.
그리고 더 무거운 그림자가 있다. 일부 지역에서 한국군이 연루된 민간인 희생 문제는, 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한국과 베트남 사이에 온전히 매듭짓지 못한 상처로 남아 있다. 외화 통계의 화려한 숫자 뒤에는, 쉽게 지워지지 않는 윤리적 부채가 함께 기록되어 있다. 베트남의 역사를 존중한다면, 이러한 그늘 또한 전향적으로 마주쳐야 한다.
도박의 결산
경제적 손익만 따지면, 박정희의 베트남 비전은 ‘성공한 도박’이었다. 파병은 주한미군을 유지시키는 역할을 하였고, 외화를 벌어 주었고, 한국 기업이 세계적 안목을 키우는 계기가 되었다. 박정희가 구상한 ‘’도약의 사다리’는 실제로 작동했다.
그러나 역사는 손익계산서로만 해석되지는 않는다. 한 세대의 젊은이들이 치른 희생과, 베트남이라는 이국땅에 남긴 상처까지 모두 포용할수 있어야 그 시대의 진면목을 체감할수 있을 것이다. 박정희의 베트남 비전은, 빛과 그림자를 함께 품은 채 여전히 한국 현대사의 가장 논쟁적인 장면중의 하나로 남아있다.
적에서 동반자로
적에서 동지로의 흥미로운 반전은 이미 오래전에 시작되었다. 한때 서로 총부리를 겨누었던 한국과 베트남 두 나라가, 반세기 지난 뒤 가장 가까운 경제 동반자가 된 것이다. 1992년 양국 수교 이후 한국은 베트남의 최대 투자국이 되었고, 2025년 기준 1만개가 넘는 한국 기업이 전투화가 아닌 작업화를 신고 베트남에 진출했다.
박정희가 예측했던 ‘기회의 베트남’은, 그가 결코 상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오늘 다시 현실이 되었다. 적에서 동반자가 되기까지의 60년, 그 긴 서사의 출발은 1964년 집권 3년차 약소국 지도자의 계산된 도박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