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5년 가을, 부산항을 출발한 수송선이 남중국해를 가로질러 베트남으로 향했다. 갑판에는 청룡부대와 맹호부대 장병들이 도열해 있었다. 대한민국 건국 이래 최초이자 최대 규모의 해외 파병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광복 20년 만에, 한국은 자국의 군대를 이역만리 전장으로 파병하는 국가가 되었다.
파병의 셈법
한국이 베트남으로 향한 배경에는 경제·안보·외교의 세 가지 셈법이 맞물려 있었다. 1964년 통킹만 사건으로 미국이 베트남 전면 개입을 선언하자, 존슨 행정부는 ‘많은 깃발(Many Flags)’ 정책을 앞세우며 우방국의 베트남 참전을 독려하기 시작했다. 미국의 입장에서 한국군은 미군보다 병력 유지비가 훨씬 저렴한 데다, 베트남과 같은 아시아인이라 전술적으로 미국보다 유리하고, 한국전쟁의 실전 경험까지 갖춘 실용적인 전력이었다.
박정희의 셈법도 분명했다. 당시 한국 방위의 근간이었던 주한미군의 베트남 차출을 막고, 부족한 외화를 벌어들이고, 대미 외교에서는 발언권을 확보하려는 포석이 깔려 있었다. 1966년 3월의 브라운 각서는 한국의 베트남 참전에 대한 반대급부를 문서로 명문화한 것이었다. 명분은 자유월남의 수호였으나, 그 이면에는 한국이라는 신생 빈국의 절박한 외화수급이 자리하고 있었다.
상승무적(常勝無敵)의 청룡
가장 먼저 전과를 올린 전투부대는 해병 제2여단, 청룡부대였다. 1965년 10월 9일 캄란만에 상륙한 청룡부대는 캄란과 동바틴을 시작으로 추라이, 호이안 일대로 작전 지역을 넓혀 갔다. 청룡이라는 이름에는 천하무적의 선봉이 되겠다는 자긍심이 담겨 있었다.
청룡부대의 이름을 세계에 알린 것은 1967년 2월의 짜빈동 전투였다. 불과 한 달 전 짜빈박 전투에서 1개 중대 규모의 청룡부대가 피해를 입고 퇴각한 터라, 북베트남군은 자신감에 차 있었다. 그러나 짜빈동 기지를 지키던 청룡부대 11중대 294명은, 연대급으로 증강된 북베트남 정규군의 야간 기습을 끝까지 막아냈다. 날이 밝았을 때 확인된 사살된 북베트남군은 243명에 이르렀다. 중과부적의 열세를 뒤집은 이 방어전으로 청룡부대는 ‘신화를 남긴 해병’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짜빈박의 패배를 절치부심 끝에 설욕한 셈이었다.
중대전술기지의 맹호
육군 수도사단 맹호부대는 또 다른 색채의 전력이었다. 초대 주월 한국군 사령관 채명신 소장은 정규전이 아닌 게릴라전의 본질을 꿰뚫어, ‘중대전술기지’ 전술을 정착시켰다. 소규모 기지를 거점으로 주변을 평정하고 주민의 신뢰를 얻는, 대민(對民) 중심의 작전이었다. “백 명의 베트콩을 놓치더라도 한 명의 양민을 보호하라”는 그의 원칙은, 무차별 토벌과는 결이 분명히 달랐다.
맹호부대는 둑꼬 전투를 비롯한 여러 작전에서 전과를 올렸고, 학교와 병원을 세우는 대민사업에도 적지 않은 공을 들였다. 한국전쟁의 참상을 경험한 군대였기에, 전쟁이 민간에게 남기는 상흔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까닭이다.
공과(功過)가 엇갈린 8년
8년 6개월에 걸쳐 연인원 약 32만 명이 베트남 땅을 밟았고, 그 가운데 5,099명이 끝내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특히 청룡부대는 사상율이 가장 높아 전사 1,202명, 부상 2,904명의 희생을 치렀다. 작전 지역이 베트콩의 기세가 강한 베트남 중부지역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파병의 역사를 공과의 어느 한쪽으로만 기록할 수는 없다. 일부 지역에서 한국군이 연루된 민간인 희생 문제는, 지금까지도 한국과 베트남 사이에 온전히 풀리지 않은 응어리로 남아 있다. 전과가 부풀려지고 피해가 축소된 정황도 적지 않았다. 더욱이 목숨을 건 장병에 대한 보상은 박하기 그지없어, 사병의 전투수당은 불과 미군의 25%에 불과했다. 외화 통계의 화려한 숫자는 청춘들의 희생과 베트남 민간인의 상처가 낳은 애증의 사생아였던 것이다. 베트남의 역사를 존중한다면, 이러한 음영까지 정직하게 포용할수 있어야 한다.
베트남 특수, 그리고 그 후
한국의 베트남 파병은 분명 ‘베트남 특수’를 낳았다. 파월 장병과 송출된 노무인력이 송금한 외화가 한국에 대거0유입되었고, 현지 공사와 물자 조달을 맡은 신흥 기업들이 급성장하며 한국내 재벌의 순위마저 뒤바꿔 놓았다. 한강의 기적을 떠받친 종잣돈의 일부는 이렇게 마련된것이다.
1969년 닉슨 독트린이 발표되고 미군이 베트남에서 발을 빼기 시작하자, 한국군의 파병 명분도 설 자리를 잃었다. 1973년, 청룡부대와 맹호부대는 모두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반세기가 지난 오늘, 한때 총부리를 겨눴던 두 나라는 가장 가까운 경제적 동반자가 되었다. 이미 한국인은 베트남을 가까운 이웃으로 생각하고 베트남 역시 한국에 매우 우호적이다. 베트남은 한국어를 제1외국어로 채택하였고, 한국인은 베트남 방문 제1관광객이다. 한국과 베트남은 서로에게 기회의 땅이 되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