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폐허의 한반도에 휴전이 선언된지 채 1년이 된지 않은 1954년 5월 7일, 베트남 북서부의 외딴 분지에서 프랑스군의 요새가 보응우엔잡(이하, ‘보’장군)이 이끄는 베트민에 함락되었다. 보장군이 이끄는 베트민이 요새를 포위한지 57일 만이었다. 이 전투는 단순한 한 번의 프랑스군 패배가 아니었다. ‘서구는 결코 식민지에 패하지 않는다’는 200년의 통념을 산산조각 낸, 세계 전쟁사의 기념비적인 사건이었다.
프랑스가 판 함정
1953년 말, 8년째 이어진 인도차이나 전쟁에 지친 프랑스는 승부수를 띄웠다. 게릴라전으로 끈질기게 버티는 베트민(월맹)을, 한 번의 정규 전장으로 끌어내 압도적 화력으로 끝장내겠다는 계산이었다. 사령관 앙리 나바르가 선택한 전장이 바로 디엔비엔푸였다.
이곳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였다. 도로가 없어 보급은 오직 항공으로만 가능했고, 1만 6천여 명의 정예 프랑스군이 요새를 지켰다. 프랑스의 계산은 단순했다. “베트민은 이 험준한 산을 넘어 대포를 끌고 올 수 없다. 그들이 평지에서 맨몸으로 달려들면, 우리 포와 항공기가 쓸어버린다.” 군사 교과서대로라면 완벽한 함정이었다.
불가능에 도전한 보장군
그러나 보응우옌잡(Võ Nguyên Giáp)은 교과서를 따르지 않았다. 그는 약 6만 명의 병력을 동원했고, 더 놀라운 것은 그의 예측불가한 전술이었다. 베트민은 대포를 분해해 사람의 등과 자전거에 싣고, 정글과 산비탈을 따라 몇 주에 걸쳐 분지를 내려다보는 능선 위로 끌어올렸다. 그리고 포를 산비탈에 깊이 파묻고 위장해, 프랑스의 항공 정찰과 반격포화가 닿지 않게 했다. 서구 군사 전문가들이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단언했던 전술이었다.
보장군은 서두르지 않았다. 1954년 1월 프랑스군 요새의 포위를 마쳤을 때 그는 즉시 공격할 수도 있었지만, 중국 군사고문단의 반대를 무릅쓰고 오히려 공격을 지연시켰다. 대신 병사들에게 명령했다. “땅을 파라.” 충분히 준비될 때까지 참호를 파고 또 팠다. “적을 강철 덫에 걸린 호랑이로 만들겠다”는 그의 말은 비유가 아니라, 냉정한 전략적 계산이었다.
57일간의 프랑스군 포위
1954년 3월 13일, 분지를 둘러싼 능선에서 베트민은 일제히 불을 뿜었다. 베트민의 1차 포격은 제2차 세계대전의 가장 격렬한 포화에 비견될 정도였다. 프랑스의 전초 진지 ‘베아트리스’와 ‘가브리엘’은 단 며칠 만에 함락되었다. 생명선이던 활주로가 포화로 파괴단되자, 항공 보급로는 차단되었다. 이 전투에서 무려 62대의 프랑스 항공기가 격추되거나 폭파당했다. .
이후 보장군의 전술은 치밀한 참호전이었다. 베트민은 참호를 거미줄 같이 파 들어가며 프랑스 진지를 한 겹씩 조여 갔다. 보급이 끊기고 병력의 추가증원도 중단되자 요새는 서서히 질식해 갔고, 5월 7일 마침내 프랑스군은 베트남에 백기를 들었다. 프랑스군은 약 2,200명이 전사하고 1만 1천여 명이 포로가 됐다. 살아 돌아온 프랑스군은 3분의 1도 되지 않았다. 승리한 베트민 역시 8천 명 이상이 전사하는 막대한 대가를 치렀다. 베트민의 승리는 결코 값싸지 않았다.
전쟁사를 다시 쓰다
베트남이 프랑스를 대패시킨 디엔비엔푸 전투는 20세기 전쟁사의 중심에 있다. 한 역사가는 이 전투를 두고 “탈식민의 역사에서 유럽 군대가 정규 회전으로 패배한 유일한 사례”라고 평했다. 식민지의 ‘오합지졸’로 여겨지던 농민 군대가, 최신 화력으로 무장한 서구 열강을 정면 승부로 꺾은 것이고, 1858년부터 100년간 베트남을 식민지배하던 프랑스를 외세의 도움없이 베트남이 패퇴시킨 것이다. 이후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수많은 식민지에 이 소식은 전율과 ‘우리도 이길 수 있다.’는 희망으로 퍼져 나갔다.
프랑스가 패퇴한 다음 날, 제네바 회담이 열렸다. 보장군이 함락 시점을 협상 테이블에 맞춰 정교하게 조율했다는 분석이 나올 만큼, 군사적 승리는 곧장 정치적 결과로 이어졌다. 그해 7월 제네바 협정으로 베트남은 북위 17도선을 경계로 남북으로 갈라졌다. 1956년 통일 선거가 약속됐지만 끝내 치러지지 않았고, 그 빈자리에 미국이 치고들어왔다. 디엔비엔푸 승전으로 프랑스의 식민시대를 끝낸 바로 그 순간, 숙명적으로 미국의 베트남전이 잉태된 셈이다.
한 전투가 흔든 60년
디엔비엔푸는 보응우옌잡을 ‘레드 나폴레옹’으로 만든 전투이자, 20세기 후반 동아시아의 판도를 다시 짜게한 사건이었다. 북위 17도선의 분단은 미국의 베트남 전쟁으로, 그리고 한국군의 파병으로 이어졌다. 한국과 베트남, 두 나라의 운명이 처음으로 교차하기 시작한 지점에 바로 디엔비엔푸 전투의 분지가 있다.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베트남이 대패시킨것은 바로 식민시대의 종언을 세계에 통보한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