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와 JFK — 1917년생 두 남자의 악수, 그리고 엇갈린 운명

1961년 11월 14일, 워싱턴 백악관. 두 남자가 점심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한 명은 세계 최강국의 젊고 잘생긴 대통령 존 F. 케네디. 다른 한 명은 불과 반년 전 쿠데타로 권력을 거머쥔 가난한 나라의 장군, 박정희.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이 만남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우연이 하나 숨어 있었다. 두 사람은 동갑이었다. 둘 다 1917년에 태어났다.

왜 그들은 만났나 — 1961년, 세계가 얼어붙은 해

두 사람을 한 식탁에 앉힌 것은 개인적 호감이 아니라 냉전이라는 시대였다. 1961년은 냉전이 가장 차갑게 얼어붙은 해였다. 그해 1월 취임한 케네디는 곧바로 시련에 부딪혔다. 4월, 그가 승인한 쿠바 피그스만 침공이 처참하게 실패하면서 젊은 대통령은 국제적 망신을 당했다. 8월에는 베를린에 장벽이 세워졌고, 동서 진영의 경계가 콘크리트 처럼 굳어갔다. 이듬해 가을이면 쿠바 미사일 위기로 세계가 핵전쟁 직전까지 치닫게 되니, 당시의 긴장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만하다.

이 공포는 아시아에서 더 구체적으로 전개되었다. 미국은 한 나라가 공산화되면 도미노처럼 이웃이 무너진다는 ‘도미노 이론’에 사로잡혀 있었다. 한국전쟁 휴전 8년차가 되던 2961년, 라오스와 베트남은 중국 공산주의 유입으로 내부 갈등이 심화되고 있었다. 냉전의 한복판에서 한국은 소련의 남진과 중국 공산당의 동진에 맞서는 태평양 방어선의 핵심 보루였다. 소련과 중국을 등에 업은 북한과 휴전선을 맞댄 최전선 국가였기 때문이다. 미국에게 한국이 흔들린다는 것은 곧 태평양의 방벽이 무너지는 것을 뜻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좋든 싫든 서로가 필요했다. 케네디에게는 흔들리지 않는 반공 동맹이 절실했고, 박정희에게는 쿠데타 정권을 향한 미국의 인정과 경제 원조, 그리고 안보 보장이 필요했다. 1961년 11월의 그 점심은, 두 절박한 셈법이 마주 앉은 자리였다.

같은 해에 태어난, 너무 다른 두 사람

케네디는 1917년 5월, 미국 동부의 부유한 정치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하버드를 나오고 2차 대전의 해군 영웅이 된 그는, 마흔셋의 나이에 미국 역사상 가장 젊은 대통령이 되어 있었다. 박정희는 같은 해 11월, 경상북도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만주 군관학교를 거쳐 군인이 되었고, 1961년 5월 16일 쿠데타로 권력을 잡았다. 같은 해에 태어난 두 사람의 인생은 이보다 더 다를 수 없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이 회담이 열린 11월 14일은 박정희의 마흔네 번째 생일이기도 했다.

선글라스를 벗어야 했던 사나이

박정희를 떠올릴 때 가장 먼저 그려지는 이미지중 하나는 검은 선글라스다. 5·16 그날, 선글라스 너머로 정면을 응시하던 차가운 군부 실력자의 얼굴 — 그것은 곧 그의 상징이 되었다. 그러나 워싱턴에서 그는 그 이미지를 잠시 내려놓아야 했다. 쿠데타로 집권한 군인이라는 꼬리표를 단 채, 그는 케네디 앞에서 전혀 다른 얼굴을 보여야 했다. “나는 공산주의에 맞설 것이고, 경제를 일으킬 것이며, 머지않아 자유선거를 치르겠다” 선언하며 미국의 의심을 거두고 정권의 정당성을 얻어내는 것 — 그것이 이 방문의 진짜 목적이었다. 그리고 박정희의 미국방문은 어느 정도 성공적이었다.

그가 식탁 위에 올린 카드 — 베트남

케네디와 마주앉은 자리에서 박정희는 뜻밖의 제안을 한다. “원하신다면, 베트남에 한국군을 보내겠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호의가 아니었다. 공산 진영이 태평양으로 뻗어 나오는 것을 한반도 바깥에서 미리 막겠다는, 일종의 선제대응이자 적극적인 반공 외교였다. 동시에 미국의 신뢰와 달러를 한꺼번에 손에 쥘수 있는 카드이기도 했다. 케네디는 정중히 거절했다. 아직 한국의 도움이 필요할 만큼 상황이 나쁘지는 않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박정희는 물러서지 않았고, 이 제안은 씨앗처럼 땅에 묻혔다. 몇 년 뒤, 10여년의 베트남 전쟁기간동안 무려 32만여명의 한국군이 전장이된 베트남 정글로 향한다. 그리고 그 전쟁이 가져다준 ‘베트남 특수’는 훗날 한강의 기적을 떠받친 종잣돈이 된다. 한국과 베트남의 60년 역사가, 바로 이 짧은 점심 회담에서 첫 단추를 끼운 셈이다.

그리고, 엇갈린 운명

가장 섬뜩한 것은 두 사람의 결말이다. 동갑내기로 태어나 1961년 가을 악수를 나눈 두 지도자는, 둘 다 암살로 생을 마감했다. 먼저 쓰러진 쪽은 케네디였다. 이 만남으로부터 정확히 2년 뒤인 1963년 11월 22일, 그는 댈러스에서 총탄에 쓰러졌다. 박정희는 그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다시 워싱턴을 찾았다. 동갑내기의 관 앞에서, 그는 자신의 운명을 어렴풋이라도 예감했을까. 박정희가 같은 길을 걷기까지는 그로부터 16년이 더 걸렸다. 1979년 10월 26일, 그는 다름 아닌 자신의 심복인 중앙정보부장의 총에 맞아 숨졌다. 케네디와의 1961년 백악관  점심만찬으로부터 18년 뒤의 일이었다.

한 장의 사진에 담긴 것

1961년 11월의 그 흑백 사진 한 장 — 젊은 대통령과 선글라스를 벗은 장군의 악수에는, 우리가 미처 몰랐던 많은 역사적 의미가 응축되어 있다. 냉전이라는 시대적 무게, 같은 해 태어난 두 사람이 암살로 생을 마감한 참혹한 비극과 베트남 전쟁의 참상은 암울했던 현대사를 웅변하고 있다. 한국 경제 도약의 출발점이 되기도 한 베트남 전쟁. 이 거대한 이야기의 서막을 연 박정희와 케네디의 그날 악수는 단순한 외교 의례가 아니라, 시대를 상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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