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베트남 역사에 관심 가지게된 계기가 된 인물이 있다. 이름은 보응우옌잡(Võ Nguyên Giáp). 한국인 대부분에게는 낯선 이름이지만, 사실 우리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 베트남에 파병되었던 32만여 한국군이 전장에서 직접 맞섰던 상대는 바로 이 사람이 맨손으로 조직한 베트콩1이었기 때문이다. 베트남전 당시에는 미군과 한국군의 적장이었고, 20세기 세계 최강으로 일컬어 졌던 프랑스군과 미군을 차례로 무너뜨린 이 사람은, 놀랍게도 정규 군사학교 문턱조차 밟아본 적 없는 역사 교사출신이었다.
정규 군사학교 출신이 아니라, 역사 교사였다
보 응우옌 잡은 1911년, 베트남 중부 꽝빈성의 유교적 애국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는 하노이에서 법학과 정치학을 공부한 뒤 하노이 탕롱 학교의 역사 교사가 되었다. 교단에서 그는 평범한 교사는 아니었다. 시간날때마다 동료 교사와 학생들에게 조국의 처지와 독립의 당위를 설파했고, 적지 않은 학생과 동료교사를 자신의 신념적 동지로 만들었다. 놀라운 사실은, 그가 평생 정규 군사훈련을 단 한 번도 받지 않았다는 점이다. 손자병법부터 나폴레옹, 조지 워싱턴, 레닌에 이르기까지 — 그는 전쟁과 혁명을 오직 책을 통하여 독학으로 익혔다.
전쟁이 앗아간 가족, 그리고 결심
교사의 길은 오래가지 못했다. 1930년, 그는 학생 시위를 지지하다 프랑스 경찰에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이후 프랑스 식민 당국의 추적을 피해 중국으로 피신한 사이에, 그의 가족은 처참한 대가를 치러야했다. 처제는 단두대에 처형당했고, 아내는 종신형을 선고받아 옥중에서 3년 만에 사망했다. 사랑하는 가족의 처참한 죽음의 비보는 그를 투혼의 혁명가로 변모시켰다. 이후 중국에서 그는 한 사람을 만난다. 호치민이었다.
34명으로 시작된 군대
1944년 12월, 보에게 군대를 조직하라는 임무가 떨어졌다. 휘하의 병사는 고작 34명. 이렇다할 총기도, 무기도, 훈련 경험도 없는, 맨발의 의병수준의 병사들이었다. 그러나 보는 이 들 오합지졸을 훗날 프랑스와 미국을 차례로 꺾는 정예군으로 키워냈다. 그의 진짜 무기는 화력이 아니라 구국의 사상이었다. 정규전과 게릴라전을 오가는 예측불허의 전략과 지략으로, 그는 약자도 강자를 패배시킬수 있음을 증명해냈다.
디엔비엔푸의 기적
1954년, 그의 전략 전술이 시험대에 올랐다. 프랑스군은 디엔비엔푸의 분지에 강력한 요새를 구축하고 베트민을 기다렸다. 정면 돌파는 불가능해 보였다. 그러나 보의 선택은 상식을 뛰어넘었다. 그는 병사들을 동원해 화포를 분해하여 야간을 틈타 산 위로 끌어 올린후 재조립 하였고, 고지대를 에워싼후 분지에 집결한 프랑스군을 포위망에 넣어버렸다. 더 결정적인 것은 허를 찌르는 전술의 변화였다. 그는 ‘속전속결’ 대신 ‘지연절술로 찬찬히 전진하는’ 방식을 택했다. 훗날 그는 이 전술변화를 결단한 날을 두고 자기 인생에서 가장 힘든 밤이었다고 회고했다. 중국 고문단의 전술조언마저 뒤집은 도박에 가까운 전술변화였지만, 출정에 앞서 호치민은 그에게 전권을 맡기며 끝까지 힘을 실어주었다. 1954년 5월 7일, 프랑스는 항복했다. 100년 가까이 이어진 프랑스의 식민 지배가 단 하나의 전투로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미국마저 꺾다
프랑스가 떠난 자리에는 미국이 들어섰다. 보는 이후 30년 넘게 북베트남군을 지휘하며 세계 최강의 군사 대국과 맞섰다. 그는 정면충돌을 피하고 게릴라전으로 미군을 지치게 한 뒤, 때가 무르익으면 정규전과 전면 공세로 전환하는 긴 호흡의 전쟁을 펼쳤다. 그리고 1975년, 마침내 베트남은 통일을 이루었다. 미국의 저명한 역사가 스탠리 카나우를 비롯한 많은 이들은 그의 전략적 재능을 웰링턴, 그랜트, 맥아더와 같은 반열에 올렸다. ‘레드 나폴레옹’이라는 별명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그는 2013년, 102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그리고 한국 — 우리가 맞섰던 상대
여기서 우리 이야기가 시작된다. 1964년 9월부터 1973년 3월까지, 약 32만 명의 한국군이 베트남에 파병됐다. 미국 다음으로 큰 규모였고, 맹호·청룡·백마 부대가 채명신 중장의 지휘 아래 싸웠다. 그런데 이들이 정글에서 마주한 상대가 바로 보 응우옌 잡이 지휘하는 인민군2과 베트콩이었다. 이 전쟁에서 약 5,099명의 한국군이 목숨을 잃었다. 한국 현대사에서 베트남은 단순한 ‘남의 전쟁’이 아니었다. 그것은 한국 경제의 도약과도 깊이 얽혀 있었는데, 그 이야기는 다음 글에서 따로 풀어보려 한다.
가장 많이 싸웠으나, 가장 모르는 적장
한국인은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 다음으로 많은 전투를 치렀고 미국 다음으로 많은 사상자를 냈다. 그러나 정작 그 전장의 반대편을 설계한 인물에 대해서는 거의 알지 못한다. 한 명의 역사 교사에서 출발해 두 강대국을 차례로 꺾은 보 응우옌 잡 — 그를 안다는 것은, 우리가 그곳에서 무엇과 싸웠는지를 비로소 마주하는 일이기도 하다.

